읽을거리
악역 영애는 왜 살아남으려 하는가: 로판 빙의물의 규칙
결말을 아는 사람이 그 결말 속으로 떨어진다. 로맨스 판타지 빙의물이 되풀이해 온 규칙들을 짚어 보고, 그 규칙을 일곱 개의 질문과 스물네 개의 결말로 옮기면서 저희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적어 둡니다.
눈을 뜨면 이미 마지막 장이 정해져 있다
로맨스 판타지 빙의물의 첫 장면은 대개 비슷하다. 주인공은 어젯밤까지 읽던 소설 속 인물로 깨어나고,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챈다. 하필이면 여주인공을 괴롭히다 처형되거나 추방되는 악역 영애다. 한국 웹소설 플랫폼에서 로판이 큰 장르로 자리 잡는 동안 이 출발점은 셀 수 없이 변주되었고, 일본에서도 悪役令嬢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란히 쌓여 왔다.
이 도입이 강력한 이유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끝이 이미 적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에서 독자는 결말을 모른 채 따라가지만, 빙의물의 주인공은 결말을 알고, 그것이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도 안다. 긴장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정해진 일을 어떻게 비껴갈까에서 생긴다. 저희 테스트의 첫 질문이 「3년 뒤 처형당하는 게 원작의 결말이다」라는 문장을 먼저 꺼내 놓는 것도 그래서다. 시한을 알려 주어야 이 장르의 시계가 돌기 시작한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몸과 평판의 어긋남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여전히 오만하고 잔인한 영애로 기억하는데, 그 안에 든 사람은 그 평판을 만든 적이 없다. 하녀들이 새 주인의 사소한 친절에 오히려 겁을 먹는 장면이 이 장르에서 흔한 것은, 빙의자가 물려받은 것이 몸만이 아니라 남이 쌓아 둔 원한이라는 사실을 가장 빨리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대본을 아는 주인공이 주는 쾌감
독자가 빙의물에 끌리는 첫 번째 이유는 아마 알고 있다는 감각일 것이다. 누가 배신할지, 어느 무도회에서 누명이 씌워질지, 어느 영지에서 뜻밖의 광맥이 발견될지 주인공은 미리 안다. 그리고 그 지식은 독자와 공유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르고 주인공과 독자만 아는 정보가 있을 때, 독자는 구경꾼이 아니라 공범이 된다.
하지만 지식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원작은 대개 악역의 입장에서 쓰이지 않았고, 악역 영애는 여주인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존재했다. 빙의한 사람은 그 장치에 처음으로 속마음을 부여한다. 미움받도록 설계된 인물에게도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원작을 다시 읽는 일. 이 장르가 오래 사랑받는 데에는 그런 재해석의 즐거움도 크다고 저희는 생각한다.
게다가 대본은 완벽하지 않다. 주인공이 첫 선택을 바꾸는 순간부터 원작은 조금씩 어긋나고, 알던 미래는 점점 믿을 수 없는 지도가 된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아 가는 정보뿐인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영리하게 쓰는가. 빙의물의 재미는 전지전능에서가 아니라, 지식이 녹아 없어지는 속도와 벌이는 경주에서 나온다.
여주인공, 남주들, 그리고 원작에 없던 사람
빙의물의 인물들은 원작에서 맡은 역할을 짊어진 채 등장한다.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원작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적일 수도, 뜻밖의 친구일 수도 있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녀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테스트의 세 번째 질문은 성녀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는 장면을 보여 주고, 그 손을 뿌리칠지, 의도부터 분석할지, 가식적으로 웃으며 잡을지 묻는다.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지만, 선택마다 원작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남주들은 대개 처음부터 악역 영애를 경멸한다. 두 번째 질문에서 남주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장면은 이 장르의 가장 흔한 굴욕이자, 관계가 뒤집힐 수 있는 첫 지점이기도 하다. 곁의 귀족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 코웃음 치며 더 당당하게 받아칠지, 세상 무해한 미소 뒤에서 복수를 계획할지. 로판 독자라면 이 셋이 각각 어떤 이야기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짐작할 것이다.
네 번째 질문의 외국 황태자는 조금 다른 장치다. 「원작에 없던 전개」는 빙의물에서 가장 불안한 순간이다. 주인공의 지식이 처음으로 쓸모없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함정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고, 원작이 틀어질까 두려워 모른 척하는 사람이 있다. 저희는 이 문항을 겉으로는 로맨스 문항처럼 두었지만, 실제로는 불확실성을 대하는 방식을 묻도록 설계했다.
줄거리를 피할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빙의물의 주인공들은 결국 두 갈래 전략 사이에서 움직인다. 하나는 피하는 것이다. 약혼을 먼저 깨고, 수도를 떠나 영지에 숨고, 사건이 벌어질 자리에 아예 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용하는 것이다. 미래의 정보를 투자와 거래로 바꾸고, 원작의 사건을 오히려 자기 무대로 삼는다. 대부분의 작품은 둘을 섞지만,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색이 크게 달라진다.
다섯 번째 질문은 이 갈림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원작대로라면 오늘 무도회에서 악행이 밝혀지고 사교계에서 매장당한다. 증거를 내밀며 정면으로 반박할 것인가,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릴 것인가, 남에게 뒤집어씌울 것인가. 여섯 번째 질문의 마지막 밤도 같은 구조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북부대공, 황제의 최측근인 비선 실세, 제국 최고의 말빨을 가진 변호사.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지가 곧 그 사람이 원작을 어떻게 이기려 하는지를 말해 준다.
어느 전략이 더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피하려던 주인공이 결국 사건 한가운데로 끌려 들어가는 것도, 판을 이용하려던 주인공이 자기 계산에 발목 잡히는 것도 이 장르가 즐겨 쓰는 전개다. 그래서 테스트는 이 긴장을 정답과 오답으로 나누지 않고, 성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만 기록한다.
일곱 개의 질문, 여덟 개의 등급, 스물네 개의 결말
테스트의 뼈대는 세 개의 축이다. 순수와 냉혹, 직감과 책략, 정면과 은둔. 여섯 개의 본 질문이 대체로 두 문항씩 한 축을 맡아 기울기를 재고, 세 축의 조합이 여덟 개의 등급이 된다. 가장 높은 S+는 냉혹하고 책략적이며 그림자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흑막의 지배자」이고, 가장 낮은 F는 순수하고 직감적이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원작대로 파멸하는 영애」다.
이 배치는 의도한 것이다. 하녀에게 상냥하고, 손을 내미는 여주인공을 믿고, 누명 앞에서 솔직하게 맞서는 태도는 현실에서라면 미덕에 가깝다. 그런데 그것은 원작 여주인공의 미덕이기도 하다. 악역의 자리에 선 사람이 여주인공처럼 굴어도, 이야기는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 생존 확률이 98%에서 2%까지 내려가는 곡선은 이 장르의 냉정한 규칙, 곧 대본을 아는 사람은 대본을 쓰는 쪽으로 넘어가야 산다는 규칙을 숫자로 옮긴 것이다.
일곱 번째 질문은 점수에 들어가지 않는다. 저항이 실패하고 원작대로 죽어 가는 순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지, 애써 부정하는지, 「어느 쪽으로 쓰러지는 게 예뻐 보일지 계산한다」를 고르는지 묻고, 그 답이 같은 등급 안에서 세 결말 중 하나를 고른다. 같은 S+라도 「판을 설계하는 준비된 악녀」가 되기도 하고 「냉철한 금융치료 전문가 악녀」가 되기도 하는 이유다. 여덟 등급에 세 갈래씩, 그렇게 결말은 스물네 개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살아남으려는 이유
낮은 등급의 결말을 쓸 때 가장 신경 쓴 것은 그것이 조롱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웃는 인간 꽃다발」, 「순진무구함의 끝판왕」,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개복치 영애」 같은 이름은 웃음을 노리고 지었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원작의 비극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겪어 내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쓰려고 했다. 생존 확률은 놀이를 위한 숫자일 뿐, 사람을 판정하는 진단이 아니다.
악역 영애가 살아남으려는 이유는 단지 죽기 싫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남이 써 둔 결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이미 정해진 역할 안에서도 자기 문장을 하나 더 써 넣겠다는 것. 저희가 이 장르에 오래 마음을 주는 것도 그 고집 때문이다. 테스트의 일곱 장면은 모두 같은 물음을 다른 옷으로 입힌 것이다. 대본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고쳐 쓰겠느냐는.